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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황폐하고 갈라진 땅을 응시하는 벼려진 시선_《헛간, 불태우다》
    공간/독서 2022. 4. 17. 23:04

     

     

     

     

    헛간, 불태우다

    20세기 미국 문단을 대표하는 작가이자 미국 남부의 인습적이고 주술적인 세계를 정묘하게 그려 낸 소설가, ‘의식의 흐름’ 등 독자적이고 실험적인 수법을 과감히 도입한 혁신가, 두 차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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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독은 일평생 하나의 영화를 만든다. 그 후 그가 만드는 모든 영화는 첫 영화의 일부일 뿐이다. 

     

     

    이야기를 두 번 이상 만들어 본 사람이라면 장 르누아르가 말한 문장에 공감할 것입니다. 저는 이 문장을 읽은 순간 언뜻 전혀 다른 두 명의 창작자가 떠올랐는데, 한 명은 홍상수이고 다른 한 명은 윌리엄 포크너입니다. 민음사 쏜살문고에서 발간한 헛간, 불태우다》는 윌리엄 포크너의 단편 5개 〈가뭄이 든 9월〉,〈헛간, 불태우다〉,〈저 석양〉,〈에밀리에게 장미를〉,〈버베나 향기〉와 포크너의 노벨 문학상 수상 연설문 및 옮긴이의 말이 수록된 단편집입니다. 책의 제목에 〈헛간, 불태우다〉가 적힌 이유는 본 작품이 저를 포함한 한국의 독자들에게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 〈헛간을 태우다〉와 이창동의 영화 〈버닝〉에 의해 가장 널리 알려졌기 때문일 겁니다. 

     

    문고본 크기에 200페이지 정도의 적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헛간, 불태우다》에 수록된 단편 소설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포크너의 다른 소설처럼 본 책에 수록된 단편들 역시 공통적으로 미시시피주에 위치한 가상의 카운티 요크나파토파(Yoknapatawpha)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다룹니다.  실제 작가가 거주하던 미시시피주의 라파예트(Lafayette) 카운티를 모델로 한 요크나파토파는 미국 내에서 낙후된 지역으로 기존의 남부의 귀족 문화에 근거한 낡고 보수적인 사회 구조가 무너지고 있는 곳입니다. 인디언의 언어로 ‘갈라진 땅’을 뜻하는 이름처럼 요크나파토파는 부유하는 흙먼지 아래 재산과 인종, 계급과 성별로 조각조각 갈라졌습니다. 작가는 다양한 시선을 차용해 무심한 듯 세심하게 자신이 사랑하는 지역을 독자에게 안내합니다.  

     

    윌리엄 포크너, 헛간 불태우다

     

     

    〈가뭄이 든 9월〉 

    건조한 9월 작은 시골 마을 재퍼슨 읍에서 백인 미니 쿠퍼가 흑인 윌 메이스에게 어떤 모욕적인 일을 당했다는 소문이 돕니다. 어떤 종류의 일인지, 실제 일어난 일인 지조차 알 수 없지만 소문이 전해진 이발소는 분노로 들끓게 됩니다. 이발사 호크쇼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매클렌던 일행은 윌 메이스를 찾아가고 결국 그를 살해합니다. 이후 미니는 마을 화제의 중심이 되지만 실성한 듯한 모습을 보이고 여전히 건조하고 뜨거운 9월의 공기에 매클렌던은 연신 땀을 닦아냅니다.  

     

    소설을 읽은 뒤에도 매클렌던 일행에게 폭행을 당하던 윌 메이스가 마구잡이로 휘두르던 주먹에 맞아 이발사의 입이 찢어진 장면이 계속해서 떠오릅니다. 매클렌던 일행을 쫓아가 폭행을 만류할 정도로 적극적이던 그 이발사가 흑인의 죽음이 벌어질 장소인 벽돌 굽는 가마로 향하는 차에서 혼자서 뛰어내릴 때의 품었을 생각이 두렵습니다. 부디 그것이 그 자신의 신변의 위협 때문에 어쩔 수 없었기를, 찢어진 입 때문은 결코 아니었기를 바랍니다.  

     

     

    〈헛간, 불태우다〉 

    땅 주인 해리스의 헛간(barn)에 불을 지른 혐의를 받는 소작농 애브너 스놉스 재판에서 해리스는 소작농의 아들 사티에게 증언을 요구합니다. 치안판사 어린 사티를 궁하지만 아이의 곤란한 모습을 보던 해리스 증언을 중지시킵니다. 그로 인해 애브너 방화 혐의를 벗되었음에도 결과적으로 스놉스 일가는 마을에서 추방당하게 됩니다. 스놉스 일가는 드스페인 소령의 소작인으로 새로이 출발합니다. 그러나 소령의 집에 깔린 프랑스 양탄자더럽힌 문제로 소령과 애브너 갈등을 겪게 되고 이에 애브너 다시 한번 방화를 준비합니다. 사티는 이 사실을 드스페인에게 알리고 곧장 아버지와 형이 향한 헛간 방향으로 달려가지만 이미 그곳에서는 몇 발의 총성이 울려 퍼집니다. 사티는 아버지를 부르며 절규하다가 곧이어 어두운 산마루에서 동이 트고 아침이 되리라 생각하며 언덕을 내려옵니다.  

     

    소년의 아버지 애브너는 당시의 기준에서건, 현대의 기준에서건 결코 좋은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는 사회적 합의에 의한 어떤 권위에도 적응하지 못하는 모습입니다. 짐승의 굽은 발톱과도 같은 애브너의 손은 깨끗하고 안락한 드스페인의 저택을 견뎌내지 못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애브너가 저택의 양탄자 처음 더럽힐 때에는 고의에 가까웠고 두 번째로 더럽힐 때에는 완전한 고의였습니다. 표면적으로는 애브너를 제외한 모든 인물과 세계가 나름의 규칙과 상식, 최소한의 연민을 가지고 작동하는 듯 보입니다. 남북전쟁 당시에도 남군과 북군의 눈을 피해 전쟁터의 말을 훔치고 다녔던 애브너의 행동은 어떤 사회적 합의에 의해 이끌어진 거대한 대의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 애브너가 지주에 대한 증오를 표출하는 수단으로 불을 선택한 것은 우연이 아닐 겁니다. 불은 그 자체로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성질을 지니기 때문에 위에서 타오르는 불보다 아래에서 붙는 불이 더 파괴적입니다. 드스페인의 안락한 저택이 대표하는 질서와 가난하고 폭력적인 아버지 애브너의 방화가 대표하는 평등 사이에서 사티는 ‘법원 건물만큼이나 큰’ 드스페인의 저택을 선택을 했습니다. 사티는 그렇게 아버지의 폭력과 단절하고 세상의 윤리에 편입하게 됩니다. 본 소설은 명백한 성장 소설입니다. 총소리가 잠잠해지고 동이 틀 언덕에서 소년은 어떤 세상을 맞이하게 될까요? 태양이 비추는 하얀 세계는 애브너의 지적처럼 ‘검둥이들의 땀'에 ‘흰 땀’을 섞어 빚은 하얗고 아름답고 윤리적인 골격으로 갖추고 있을지 궁금합니다. 헛간을 불태우는 빛은 충실한 소방수들이 언젠가는 꺼트리겠지만 동이 터오는 새벽은 그 누가 막을 수 있을까요? 

     

     

    저 석양 

    성매매를 통해 백인 남자의 아이를 임신한 흑인 낸시는 스토벌에게 제대로 받지 못했던 화대를 요구했다가 오히려 폭행당하고 유치장에 갇힙니다. 낸시는 유치장에서 자살을 기도하지만 실패하고 이후로 남편 지저스의 살해 위협에 시달리게 됩니다. 원래 부엌일을 하던 달지가 아파서 낸시가 콤슨 집안의 부엌일을 대신하게 되고 그녀는 콤슨 집안에 숨음으로써 지저스의 살해 위협으로부터 벗어나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달지는 다시 몸을 회복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낸시는 콤슨 집안의 아이들을 꾀어내 자신의 집에 머물게 합니다. 

     

    퀜틴을 서술자로 하여 낸시가 겪는 일을 묘사하는 소설입니다. <헛간, 불태우다>와 마찬가지로 아이의 시선으로 사건을 묘사하기에 필연적으로 서술상의 공백이 발생하게 되는데 작가는 이러한 여백을 아주 능숙하게 이용해 이야기를 매끄럽게 진행시킵니다. 아이다운 순진함으로 시도 때도 없이 대화에 끼어드는 캐디와 제이슨은 마치 어디선가 실제로 겪었던 것만 같은 대화의 흐름으로 독자의 몰입을 극대화시킵니다. 낸시의 고용주인 제이슨 씨네 집은 낸시에게 매몰차지 않지만 결국 딱 그 정도의 개입을 함으로써 낸시가 겪게 될 일을 짐작하게 만듭니다. 지저스의 접근이 실제인지, 아니면 일련의 사건을 겪은 후 판단력이 극도로 흐려진 낸시의 과민한 반응일지는 모르겠지만 제이슨 씨와 세 아이들은 따뜻하고 행복한 가정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사실, 그리고 독자는 방관하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안락한 안락의자에서 무거운 엉덩이를 들고일어날 수 없다는 그 사실은 너무나 명백합니다. 분노한 ‘지저스'는 백인 남성을 건드리기는커녕 백인 아이들조차 건드릴 수 없겠지요. 독자는 흑인 여성인 ‘낸시’가 마주한 공포를 뒤로하고 퀜틴의 가족과 함께 고개를 넘어갈 것입니다.   

     

     

    〈에밀리에게 장미를〉 

    마을과 어떠한 교류도 없이 살아가던 에밀리의 장례식 날 그녀의 집은 마을 사람들에게 처음으로 공개됩니다. 결혼을 하지 못한 채로 늙어간 에밀리는 어떤 방문객도 받지 않고 우편함과 같은 작은 변화조차 거부한 채 흑인 하인 한 명의 도움으로 살아왔습니다. 에밀리에게 오던 수없이 많은 마을 청년들의 구애를 쫓아낸 그녀의 아버지가 죽은 뒤 에밀리는 도로포장 공사 때문에 마을에 온 북부인 감독관 호머 배런과 가까운 사이가 되지만 배런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아는 마을 사람들은 에밀리를 동정합니다. 그러나 에밀리는 배런과의 혼인을 준비하고 에밀리의 집에 들어가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배런은 마을에서 사라집니다. 이후 아이들이 한 명씩 자라나며 마을을 떠나 공예 수업마저 끝나게 되고 그날 이후 에밀리와 마을의 교류는 끊깁니다. 다시 장례식, 에밀리의 시신이 묻힌 후 마을 사람들은 굳게 잠긴 위층 방을 부수고 들어갑니다. 침대에는 호머 배런 시신의 잔해와 에밀리의 머리카락이 발견됩니다.  

     

    에밀리는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몰락해가는 백인 여성입니다. 에밀리의 서사는 노예제를 토대로 한 플랜테이션에 기반하던 미국 남부의 향신 계급이 초라하게 몰락하는 과정을 은유하는 듯합니다. 남부군으로 참전했던 전 시장 사토리스 대령이 주도한 세금 면제나 자신들의 자식들에게 약간의 현금을 쥐어준 채 억지로 공예 교실로 보내던 사토리스의 또래 세대가 에밀리에게 베풀던 관용이 끝나고도 끈질기게 이어지는 에밀리의 생활은 마치 낡아버린 돌 석상의 표정처럼 섬뜩하면서 안타깝습니다. 본 작품에서 가장 흥미를 끄는 호머 배런과의 관계에 대한 서술상의 미스터리는 장르물로서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훌륭합니다. 에밀리의 시신이 삼나무 숲에 가고 난 뒤 저는 같은 시간 동안 에밀리를 보필한 흑인 하인에 대해 생각합니다. 에밀리가 죽자마자 그 집을 떠나고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던 하인에게 장미를.   

     

     

    버베나 향기〉 

    아버지 사토리스의 죽음을 전해 들은 후 베이어드는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사토리스는 이전의 사업 파트너이자 정치적 라이벌인 레이먼드를 몰아붙이다가 살해당했습니다. 자신의 전공 교수를 포함한 거의 모든 주위 사람들은 베이어드가 아버지의 복수를 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젊은 의붓어머니 드루실라는 베이어드에게 권총을 건네며 아버지의 복수를 종용합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동생 제니는 베이어드가 다락방에 하루 종일 숨어있을 지라도 자랑스럽다고 말하며 베이어드의 복수를 만류합니다. 결전의 날 베이어드는 아버지를 죽인 레이먼드를 찾아가지만 허공을 향해 총을 발사하고 레이먼드는 마을을 떠납니다.  

     

    요크나파토파는 법학 교수마저 권총을 전해주며 복수를 종용하는 듯한 모습을 보일 정도로 남북전쟁 이후로도 지역적 관습이 공고한 공간입니다. 포크너가 책을 집필하던 20세기 전반부는 명예와 긍지라는 이름 아래 전쟁터로 향한 너무 많은 생명이 허무하게 목숨을 잃는 시대였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사토리스 집안의 두 여자가 사건을 받아들이는 방식입니다. 베이어드의 의붓어머니 드루실라와 고모 제니 모두 전쟁과 폭력으로 사랑하는 사람들, 특히 평생의 동반자를 잃은 경험이 있습니다. 두 여자의 이런 비슷한 경험은 서로 다르게 발현되어 각자가 원하는 방향으로 베이어드를 설득합니다. 결국 베이어드는 자신의 방식으로 ‘자존심을 지킵’ 니다. 우리 모두는 피로 해결하는 복수의 뒷맛을 알고 있습니다. 살인으로 갈등을 해결하는 것은 갈증을 바닷물로 해결하는 것과 같고 손에 묻은 피를 피로 씻어내는 것과 같기에 베이어드는 이를 거부합니다. 긴장한 채 앉아 있는 레이먼드를 쏘는 대신 베이어드는 허공을 향해 권총을 발사하고, 레이먼드는 마을을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습니다. 한 시대를 상징하는 죽음과 그 이후의 사건을 다뤘다는 점에서 성석제의 골계미 넘치는 소설 《왕을 찾아서》가 떠오르기도 했고 귀향의 감정을 지녔다는 점에서 김승옥의 〈무진기행〉을 연상하기도 했습니다.   

     

     

    〈노벨 문학상 수상 연설문〉과 〈옮긴이의 말〉 

    책의 뒷부분에는 작가의 노벨 문학상 수상 연설문이 수록되었습니다. 연설문에서 포크너는 ‘인간의 마음’에 대한 글을 써야 한다고 힘주어 말합니다. 글쓰기란 영구히 지속될 어떤 인간의 보편적인 진실들에 기반해야만 한다고 말하며 동정이나 연민 없이 쓰는 글은 상처 하나 남기지 못한다는 말은 가볍게 넘길 수 없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보편적인 연민을 강하게 열망하고 있는 그의 후배로서 깊이 새길 말이었습니다. 〈옮긴이의 말〉에서 제공하는 포크너의 세계관과 각 단편에 대한 간단한 해제를 통해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었던 점이 좋았습니다.  

     

     

     

    A. 윌리엄 포크너가 바라본 차별과 폭력

     

     

     

    일련의 단편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점은 담담하고 건조한 상황 묘사였습니다. 마치 이창동 영화의 쇼트를 볼 때 느끼는 것과 유사한 이러한 건조함을 통해 작품들은 날카로움을 성취합니다. 이런 날카로움은 독자의 마음에 오래 남을 상처를 입힙니다. 창작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수록된 단편의 특징 몇 개를 간단하게 정리했습니다. 

     

    1. 포크너는 일인칭과 삼인칭을 오가며 다양한 시점을 활용합니다. 특히 〈헛간, 불태우다〉와 〈저 석양〉에서 아이의 시선에서의 서술을 통해 작가는 깊은 몰입을 유지하며 동시에 이야기의 초점을 쉽게 유지합니다.  중간중간 던지는 먼 훗날의 인물의 간단한 회상은 이야기의 깊이를 심화하는데 도움을 줍니다.  

     

    1. 많은 작품에서 연대기적 서술 기법을 탈피합니다. 〈저 석양〉, 〈에밀리에게 장미를〉, 〈버베나 향기〉에서는 과거에 대한 회상이 시간 순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별도의 안내 없이 시작되는 회상은 이음매 없는 매끈한 뱀이 지나간 것처럼 서사를 진행시킵니다. 이러한 방식은 얼핏 난해하게 보이지만 작가가 말하고 싶어하는 부분부터 서서히 공개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더군다나 이야기의 흐름을 서술자가 오롯이 책임지기 때문에 그 흐름을 즐기는 것 또한 큰 재미 요소입니다. 저는 포크너의 단편들을 읽으며 〈군산: 거위를 노래하다〉에 대한 장률 감독의 인터뷰를 떠올렸습니다. “기억은 자신 만의 순서가 있다. … 기억의 순서대로 한 거다. 일상의 기억도 순서대로 가는 것 같지만 거의 그렇지가 않다”라고 말한 장률 감독의 말에 동의한다면 포크너의 서술이 더욱 매력적으로 느껴질 것입니다. 

     

    1. 다양한 시점을 활용하지만 동시에 감정의 묘사에는 자신만의 어떤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작가의 분해능이 허용하는 한에서 묘사합니다. 이러한 특징은 〈가뭄이 든 9월〉과 〈저 석양〉에서 드러나는 약자에 대한 폭력의 묘사에서 특히 두드러집니다. 이것은 단지 담담한 어조를 택한다고 해서 성취할 수 없습니다. 폭력의 근원에 대한 독자적인 사유가 필요한 영역입니다. 

     

    1. 몇 가지 작품에서는 과거와의 과감한 단절을 이뤄 내는 주인공의 결단이 돋보입니다. 〈헛간, 불태우다〉와버베나 향기〉에서는 인물들은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 자신을 지배하던 기존의 세상을 부숴야만 합니다. 이렇게 내딛는 걸음을 작가는 결코 꿈처럼 달콤한 경험으로 표현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과정이 아무리 혹독하고 고될지라도 우리는 미래를 향해 걸음을 내딛어야만 한다는 것을 알기에 저는 포크너의 시선이 좋습니다.  

     

    1. 낙후되고 보수적인 시골 지방을 배경으로 인종과 계급에 대한 담론을 다뤘다는 사실은 어느 정도 인지한 상태였지만 이번에 처음 읽은 포크너의 소설에서 인상깊었던 요소를 택하라면 단언코 여성에 대한 담론을 고르겠습니다. 작가는 〈가뭄이 든 9월〉〈에밀리에게 장미를〉에서 여성 서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포크너는 〈에밀리에게 장미를〉에서 진보하지 못한 사회 체제 몰락의 묘사를 시집을 가지 못한 몰락한 향신층 노처녀의 묘사를 통해 성취하고 있는데 당시 결혼을 하지 않은 ‘미스’를 바라보는 보수적인 남부의 시대상을 감안해야 할 점도 분명 존재합니다. 제가 굳이 이런 언급을 하는 이유는 혹여나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에 대한 논쟁과도 같이 현대의 잣대에 비춰 이 작품이 성취한 것이 평가절하 되는 것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B. 포크너의 삼각관계, 이창동의 삼각관계:

       〈버닝〉의 종수와 〈헛간, 불태우다〉의 사티

     

    이 책을 고르게 된 계기는 단편집의 제목으로도 쓰인 <헛간, 불태우다>라는 작품 때문이었습니다. 한국에서 〈헛간, 불태우다〉는 이창동 감독의 〈버닝〉과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의 〈헛간을 태우다〉로 인해 유명해졌고 저 또한 〈버닝〉을 통해 본 책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하루키의 〈헛간을 태우다〉를 읽은 적은 없지만 읽어본 사람들의 언급에 의하면 〈버닝〉은 하루키의 세계를 굉장히 충실하고 풍부하게 그려내고 있다고 합니다. 비록 〈버닝〉은 포크너가 아닌 하루키의 〈헛간을 태우다〉를 원작으로 하고 있고 인물의 관계나 내용적 측면으로도 포크너의 헛간보다는 하루키의 헛간을 충실하게 재현한다고 합니다만 영화 자체가 포크너의 세계관에서도 굉장히 많은 유사점을 찾을 수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저는 〈버닝〉의 종수와 〈헛간, 불태우다〉의 사티 사이의 유사성에 대한 언급을 해보려고 합니다.  

     

     

     

    종수와 사티는 거울상처럼 유사한 점이 많으면서도 대칭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종수의 아버지와 사티의 아버지 모두는 체제를 향해 별 볼 일 없는 저항을 하고 이는 단지 가족을 불행하게 만들 뿐 결과적으로 철저하게 실패합니다. 본인의 아버지가 재판을 받는 상황에서 사티는 아버지에게 불리한 진실을 말하려고 하지만 종수는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탄원서에 거짓을 적습니다. 사티와 종수의 대칭된 행동은 극의 후반부에 각각 아버지의 세계를 거부하는지, 수용하는지에서도 나타나게 됩니다. 

     

    사티는 아버지의 방화 살인 계획을 알게 된 순간 자신에게 이어진 에브너의 핏줄을 끊어내고 저택과 헛간의 안락한 세상에 속한 사회의 윤리에 순응합니다. 드스페인의 저택에 감응하는 사티는 애브너의 세계에서 분화되어 아버지의 살해를 초래하고 결과적으로 사회에 종속됩니다. 사티가 윤리에 순응하게 되는 것은 철학적 좋음을 이룬다는 뜻은 아닙니다. 드스페인이 노예제와 자본 격차를 이용해 부를 착취하는 것은 윤리에 속하지만 에브너가 드스페인의 양탄자를 더럽히는 일은 윤리에 속하지 않습니다. 결국 윤리는 체제를 구성하는 한 구조물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체제에 수용하는 순간 사티 개인에 있어서는 평화와 행복이라는 상태에 가까워질 확률이 높아진다는 점에서 그 윤리라는 것을 마냥 폄하할 수는 없겠지요. 

     

    이에 반해 종수의 상황은 조금 더 복잡합니다. 벤은 드스페인보다는 드스페인의 자손에 비유되는 것이 알맞겠습니다. 고도의 자본 사회는 부와 착취의 상징이었던 헛간(비닐하우스)마저 쓸모없고 방치된 것으로 만들고 이를 태워버리는 것을 유희로 삼습니다. 종수는 비슷한 처지의 해미에게서 자신만의 목적을 발견하지만 해미는 너무나 쉽게 자본 사회의 윤리와 쾌락에 감응합니다. 형편에 맞지 않게 큰 카드 빚 때문이던, 벤의 가학적 쾌락 때문이던, 종수의 열등감 때문이던 결과적으로 해미는 사라져 버리고 종수는 종속될 윤리마저 찾지 못한 채 모호함 속에서 헤맬 수밖에 없죠. 체제라는 것은 너무나 거대하고 너무나 무고해서 종수의 동경과 분노는 방향성을 잃게 됩니다. 이런 모호함 속에서 종수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해석하고 이를 기반으로 개인인 벤을 분노의 대상으로 설정합니다. 결과적으로 종수는 아버지의 분노라는 유산을 이용해 벤을 살해하는 소설을 써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이창동은 포크너와의 단절을 이룹니다. 자신을 둘러싼 모호함을 자의적으로 확정한 종수는 헛간보다 더 큰 것을 파괴합니다. 드스페인 후손의 목숨과 그의 독일제 암말이죠. 이것만으로 종수가 유산 계급의 윤리를 전복시킬 수 있을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종수는 훌륭한 창작자입니다.  

     

     

    C. 파주에서.

     

    한 가지 일을 끝나고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일이 손이 잡히지 않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저는 무언가에 집중하기 위해 간단한 그림 작업을 여유롭게 진행하면서 이창동의 <버닝>에 대한 글을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도중 찰스 디킨스의 소설이 꽂힌 도서관 서고의 옆자리에서 우연히 윌리엄 포크너의 소설을 발견하고 두껍지 않은 분량에 충동적으로 책을 빌렸습니다. 며칠 후 눈과 비가 예고된 3월의 어느 주말 좋은 공기업에 취직한 친구가 파주에 있는 커피숍으로의 드라이브를 제안했습니다. 저는 읽던 디킨스를 잠시 내려놓고 아직 펴보지 않은 《헛간, 불태우다》를 집어 들고 제안에 응했습니다. 가양대교를 건너 자유로에 들어서 한참을 달리다 구불구불한 골목과 낡은 도로를 지나 호수에 도착했고 쌀쌀한 3월의 흐린 날씨에 우비를 뒤집어쓴 앳된 얼굴이 제2 주차장의 만차를 알리며 제3 주차장에 주차할 것을 안내했습니다. 커피숍에서 조금 떨어진 장소에 차를 바치고 한 잔에 칠천삼백 원짜리 커피와 한 조각에 칠천 원짜리 빵을 먹고 마시면서 《헛간, 불태우다》에 수록된 단편을 읽었습니다. 커피숍의 뷰는 좋았고 가게 안에는 유복하고 행복한 사람들이 가득하고 주위를 둘러싼 산에는 아직도 눈이 쌓여 있었습니다. 

     

     

     

     

     

     

    적어도 그 장소에서는 시간과 행복이 모두 상대적이었습니다. 커피를 마신 뒤에는 경기도 북쪽을 가로질러 다시 서울로 돌아왔습니다. 몇 개의 고개를 넘어야 했는데 아직도 눈이 쌓여있었습니다. 저는 그곳에서 어떤 종류의 가능성, 잃어버린 가정을 보았습니다. 종수와 양희의 집이 파주 어딘가에 있었을 것이고 은모와 중식도 한때 이곳을 지났겠지요. 차는 계속해서 산과 호수, 건물들을 지나쳤습니다. 구불구불한 고갯길을 지나는 동안 바라본 그 풍경들은 제게 마지막 겨울이었던 셈입니다. 

     

     

     

     

     

     

    서울로 돌아오니 해가 지고 있었습니다. 길을 잘못 들어 성산 대교를 건너게 되었습니다. 저는 구름 낀 날의 노을을 좋아합니다. 지평선 가까이에서 해의 흔적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월드컵 대교의 조명이 찬란했습니다. 어쩌면 잘못 든 길에 본 다리의 조명 때문에 이날의 기억이 유독 강하게 남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최근 읽었던 에릭 홉스봄의 《혁명의 시대》와 《자본의 시대》에서 다루는 미국의 경제 체제의 변화에 대입해서 동시대의 요크나파토파를 상상하며 읽으니 더욱 즐거웠습니다. 본 책에 수록된 작품 중에서 가장 깊은 인상을 준 것은 〈에밀리에게 장미를〉이나 〈버베나 향기〉였습니다. 책장을 덮은 후 좋은 메타포는 독자가 씹어먹을 수 있는 메타포임을 다시 한번 깨닫습니다. 물론 포크너는 다작을 한 작가이므로 단지 단편 5개를 읽었을 뿐인 제가 작가의 세계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필히 한계를 지닐 것입니다. 포크너의 연작을 더 읽어보고 난 다음 작가에 대해 글을 쓰고 싶습니다. 다음에는 소리와 분노》를 읽어 봐야겠습니다. 

     

     

    20220417

     

     

     

     

     

     

     

     

     

     

    읽었던 글 중에서 좋은 글 몇 가지를 소개합니다.  

     

     

    비록 책을 읽고 난 후였지만 서평을 읽으니 좋았습니다.

    9월 가뭄의 불모성을 매클렌던과 미니가 가진 불모성과 비교한 시선과 이발소 선풍기를 이발사에 빗댄 시선이 좋았습니다. 

     

    에브너와 사티의 부자 관계를 자아의 측면에서 이해하는 데에 좋은 글입니다. 

    미나, 기능장애 가정에서의 사티의 성장 

    http://www.aellk.or.kr/datax/thesis/11011746482988.pdf

     

     

    드루실라와 제니 고모에 대한 폭넓은 배경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참조한 글에서 〈버베나 향기〉의 드루실라를 ‘남성화’되었다고 표현하는데 이러한 표현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라도 너그러운 마음으로 드루실라의 사회적 역할 변화에 초점을 맞춰 읽는다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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