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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은 세상의 해석이다_〈버닝〉
    공간/영화 2022. 3. 15. 19:11

     

     

     

     

    버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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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년 〈버닝〉이 개봉했을 무렵 국내의 인터넷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이 영화가 50년대생인 감독이 청년에 대한 피상적인 몰이해를 바탕해서 만든 시대착오적인 영화라는 주장이 제기되었습니다. 이러한 의견이 다원성에 기반한 산발적인 감상으로 끝나지 않고 몇몇 영향력 있는 의견 게시자와 다수의 추종자들에 의해 꽤나 심도 깊은 비판으로 전개되는 과정은 상당히 놀라운 현상이었습니다. 물론 다각도에서 이루어지는 다양한 해석은 자연스럽고 건전한 현상이며 작품을 둘러싼 소음은 좋은 창작물의 숙명입니다. 이렇게 다양한 관점, 때로는 공격적이기까지 한 관점의 논의 속에서 나온 성숙한 합치가 작품을 불멸의 반열에 들게 하는 필수적인 요소 중 하나라고 생각하는 저이지만 한국에서 조직적이고 집단적으로 전개되었던 〈버닝〉에 대한 비판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그러한 주장은 제게 알폰소 쿠아론의 〈로마〉나 홍상수의 〈강변호텔〉이 흑백으로 촬영되었다고 시대착오적인 영화라고 몰아붙이는 것만큼 근시안적으로 느껴질 뿐입니다.

     

    소설가의 영화를 찍던 감독의 소설, 버닝입니다.

     

    이창동, 버닝

     

     

     

     

     

     

    1. 한 발자국 안으로 들어간 소설가

     

    담백한 감독의 풍부한 영화입니다. 교사이자 소설가 출신인 이창동 감독은 〈초록물고기〉, 〈박하사탕〉, 〈오아시스〉, 〈밀양〉, 〈시〉를 거쳐 〈버닝〉을 만들었습니다. 감독의 초창기 작품인 〈초록물고기〉와 〈박하사탕〉에서는 현재라는 프리즘에 과거의 빛줄기 비춰 찰나의 순간들을 섬세하게 분광시킵니다. 이후 〈오아시스〉, 〈밀양〉, 〈시〉에서는 우리가 과거를 비출 때 썼던 현재라는 프리즘의 모양과 소재를 탐구합니다. 차갑고 단단한 현재를 세심하게 깎던 감독은 문득 이 행위의 목적을 재고합니다. 그 물음의 투영이 영화 〈버닝〉입니다.

     

     

     

     

     

     

    이전 작품에서 감독은 본인의 삶과는 거리가 있는 주인공을 주로 내세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남성 소설가인 종수의 시선을 따라가는 영화 〈버닝〉은 어딘가 자전적으로 느껴집니다. 그동안 견지하던 주인공과의 의도적인 거리 두기를 포기한 감독은 '무엇을 써야 할지 모르는' 젊은 종수를 통해 창작자로서 의문투성이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이끕니다.

     

    감독의 언급에 의하면 〈버닝〉은 청년들의 마음속에 있는 분노에 대한 영화라고 합니다. 실제로 건국 이래 자유와 민주화를 쟁취하기 위해 늘 선봉에 섰던 한국의 청년 세력이지만 제도적 민주화 이후에는 탈냉전적 기류에 떠밀리듯 청년들은 분노의 방향성을 잃었습니다. 학생운동이라는 단어 자체가 소멸해버리고 구심점을 잃은 채 구조에서 개인으로 방향을 튼 분노는 더 이상 정치적으로 위협적이지 않습니다. 거기에 더해 인구 구조와 경제 구조 모두에서 청년은 협상과 타협의 대상에서 위로하고 동정해야 되는 존재로 바뀌었습니다. 그럼에도 감독은 젊은 종수를 내세워 청년을 손쉽게 위로하지 않고 보다 어려운 타협을 시도하려고 합니다. 

     

     

     

    2. 계급에 대한 담론의 종말

     

    저는 예술적인 책보다는 사회적인 책을 선호하고, 사회적인 영상보다는 예술적인 영상을 선호합니다. 매체가 입체적일수록 논리보다는 직관이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탓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게 〈버닝〉은 사회성보다는 예술성이 짙은 영상입니다. 영화는 분명 사회적 표상을 매개하여 진행되지만 그것을 스크린에 담는 방식은 지극히 예술적입니다.

     

     

     

     

     

     

    그 방식은 마치 종수의 집 마당에서 열리는 작은 가든파티와 같습니다. 파주시 탄현면에 있는 종수의 집은 슬레이트 지붕이 얹힌 낡고 오래된 주택입니다. 휴전선이 바로 근처이기 때문에 북한의 확성기에서 나오는 대남 방송이 꿈결처럼 웅얼거리는 곳이죠. 소똥 냄새가 감도는 마당에서 종수와 해미, 벤은 노을을 배경으로 작지만 멋진 가든파티를 즐깁니다. 벤이 재미있어했던 웅얼대듯 들리는 대남 확성기 소리는 포르셰에서 설치된 중저음이 훌륭한 오디오 시스템에 깨끗하게 묻힌 채 그들이 대마초를 나누어 피는 데 어떠한 방해도 할 수 없습니다. 북한에 대한 의제는 포스트 민주화 한국에서는 딱 그 정도의 잡음일 뿐입니다.

     

    이것은 범시민적 민중 운동이 군사 독재를 굴복시키고 나서 학생 사회의 주류를 차지하게 된 NL 세력이 민족의 단일성과 통일을 주창하며 시도한 공상적 민족 해방의 노력이 전부 처절하게 실패한 원인과도 연관이 깊습니다. 1차 냉전(슬프게도 오늘날의 국제 정세에 의해 확정된 표현이지만)의 종식 후 제1 세계의 급속한 번영은 적으로서의 북한이나 가족으로서의 북한에 대한 의제 모두 한물 가버린 시시한 잡음으로 만들었습니다. 소똥 냄새나 확성기 도발은 시야에서 멀리 떨어진 채 관객의 뇌리에는 노을을 배경으로 추는 해미의 춤과 포르셰만이 남습니다.

     

     

     

     

     

     

    엄연히 실존하는 위협임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분단 한국의 좌우 모두에서 북한에 대한 이야기를 촌스럽게 여깁니다. 마찬가지로 계급 한국에서 울리는 투쟁의 확성기도 점점 구시대의 유물로 녹슬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옳다고 하고 누군가는 그르다고 하겠지만 양 측 모두 체제 대 체제에서 집단 대 집단, 더 나아가 개인 대 개인으로 흐르는 사회의 흐름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현재 한국에서 집단 대 집단의 싸움은 거의 마무리지어진 것 같습니다.

     

    벤의 어머니는 문화적인 공간에서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교양 있고 행복한 식사를 즐길 것이고 종수의 아버지는 주위를 파괴하고 결국엔 그 자신을 좀먹는 폭력성 때문에 감옥에 들어갈 것입니다. 종수의 아버지는 기껏해야 자신을 찾아온 말단 공무원에게 행패나 부릴 수 있을 뿐 그의 주먹은 체제 자체는커녕 벤의 부모님까지도 닿을 일이 없습니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종수의 아버지가 변호사 친구의 조언대로 강남에 아파트를 샀다면 벤과 종수가 같은 진영에 속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 재미있으면서 처연합니다. 

     

     

     

     

     

     

    대한민국 계급투쟁의 전반에 있던 벤의 어머니와 종수의 아버지의 싸움은 이미 끝났습니다. 이제 그들의 DNA를 물려받았고 각각의 환경에서 자라난 벤과 종수의 싸움만이 남아있을 뿐입니다. 군부 한국의 담론과는 다르게 그의 자식 민주 한국의 담론은 다원성의 토양 위에서 전후방의 구분이 없이 진행됩니다. 표면적으로는 철저하게 개인의 능력에 의지하는 듯한 모양새를 띠고 오로지 금전이라는 가치에 기댄 채 그들의 싸움은 비닐하우스나 우물 같은 은유의 물밑에서 고요하지만 치열하게 진행될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알기 때문에 이미 승자의 측에 서있는 벤이 엄마와의 통화에서 농담조로 말하는 'DNA가 우수'하다는 발언은 묘하게 거슬립니다. 이러한 거슬림은 이후 개봉한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을 볼 때 관객이 느끼는 수치심을 더 예민하고 섬세하게 주조한 것과 같습니다.

     

    여기까지 보면 영화는 처절하면서 우아한 계급투쟁의 우화를 다룬 듯합니다. 그러나 〈버닝〉을 혁명을 충돌질하기 위한 영화로 보기엔 종수가 마주한 미스터리에 대한 분노의 불씨가 폭발하는 곳은 어쩐지 포템킨의 함포가 겨냥하는 오데사의 극장보다는 홀든 콜필드의 냉소적인 혀끝이 겨냥하는 뉴욕의 겨울 거리와 닮았습니다. 저는 작품에 대한 애정을 담아 조금 더 당돌한 주장을 해보고 싶습니다. 지금부터 저는 〈버닝〉을 청년에 분노에 대한 우화(寓話)가 아닌 미숙한 예술가의 우화(羽化)로 보려고 합니다.

     

     

     

    3. 알몸과 삼위일체

     

    니체의 말에 의하면 '성숙이란 어릴 때 놀이에 열중하던 진지함을 다시 발견하는 데 있다.'고 합니다. 저는 성숙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는 한 명의 창작자로서 위 인용의 '성숙'을 '창작'이라는 단어로 바꿔서 말하곤 합니다.

     

    '창작이란 어릴 때 놀이에 열중하던 진지함을 다시 발견하는 데 있다.' 

     

    창작자가 성숙을 이뤄나가는 과정은 치열한 자기부정을 거친 변태(態)를 통해서 이뤄집니다. 이를 종수가 해미를 만나고, 해미의 상실이 벤과의 관계를 이끌고, 이내 벤의 상실을 거쳐 다시금 종수로 거듭나는 관점에 비유하겠습니다.

     

    영화 속에서 종수는 창작자입니다. 운송 일을 하는 도중 만나게 된 해미는 종수에게 행운과도 같습니다. 종수는 있지도 않은 귤을 먹거나 고양이와 우물 같은 모호한 이야기를 하는 해미를 사랑합니다. 해미의 북향집에 비치는 빛이라고는 타워에 반사된 찰나의 빛 한 조각일 뿐이라도 말이죠. 성형을 하고 카드 빛에 시달리면서도 삶의 의미를 갈망하는 해미는 언제든 원한다면 아프리카로 훌쩍 떠나버릴 정도로 현실 너머의 그 무언가에 취한 듯 보입니다. 

     

     

     

     

     

     

    해미의 그런 과감함은 필연적으로 종수의 세계에 벤을 등장시킵니다. 벤은 겉보기에 여유롭고 성숙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벤 역시 해미가 지닌 모호한 면이 있습니다. 벤의 모호함에는 어딘가 계산적인 구석이 있어서 해미가 지니는 모호함과는 다르게 종수를 끝없이 시험하려고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종수와 해미와 벤이 함께 있던 순간은 불안하고도 행복한 순간입니다. 벤이 태우는 대마초는 해미의 손을 통해 종수로 넘어가죠.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벤의 존재만으로도 해미와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게 됩니다. 종수와 단 둘이 있을 때 해미가 옷을 벗으면 종수도 같이 옷을 벗고 섹스를 하며 찰나의 빛을 바라보는 아름다운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벤과 함께 있을 때의 종수는 철저하게 관객의 시선에서 해미에게 상처를 입힙니다. 이는 종수가 의도하지 않았던 해미의 상실을 이끌게 됩니다. 

     

    해미의 상실 이후 만남의 목적이 해미에서 벤으로 옮겨지는 과정은 결코 종수에게 즐거운 경험이 아닙니다. 이는 벤에게도 마찬가지인 듯합니다. 해미가 존재할 때는 벤이 종수를 찾았지만 벤과의 만남 이후 해미와의 관계가 파탄이 나자 종수가 일방적으로 벤의 뒤를 쫓게 됩니다. 여기서 종수를 대하는 벤의 태도는 흥미롭습니다. 이전에도 벤은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습관이 있다며 종수를 충동질했습니다. 실제로 이후 종수는 별 의미도 없도 실제로 어디에 있을지도 모를 희생될 비닐하우스를 지키느라 자신의 시간을 소모합니다. 이에 대비되는 흥미로운 여행담, 용산참사를 다룬 그림, 윌리엄 포크너의 소설, 권위 있는 종교인과의 만남과 좋은 물건들은 이미 모두 벤의 소유이지요.

     

     

     

     

     

     

    벤의 모호함은 해미의 모호함마저 종속시킨 상태입니다. 비닐하우스라는 의미심장한 은유를 언급하는 벤이 살고 있는 반포의 고급 빌라에는 종수는 자신이 해미에게 줬던 손목시계와 똑같은 시계가 있고 해미를 연상시키는 듯한 벤의 새 친구도 있습니다. 게다가 벤의 빌라에는 종수와 해미의 매개였던 고양이 보일이까지 살고 있죠. 미시 세계의 불확정성을 상징하는 고양이가 종수의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순간 종수는 자신이 마주한 모호함에서 깨어납니다. 종수를 그토록 매료시켰던 해미의 모호함이 벤의 집에서는 그 운동성을 잃고 한낱 전리품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간과해서 안 되는 것은 종수가 내린 결론이 해미의 원본이 아닌 해미의 시뮬라크르에 근거한다는 점입니다. 해미를 상실하고 나서야 종수는 자기 세상의 전부였던 해미라는 원본에 종속되지 않고 주체적인 해석을 만들 원동력을 얻었습니다. 그 결과 벤의 상실은 해미의 경우와는 다르게 철저한 종수의 의도 아래 주체적으로 이끌어집니다. 눈 내리는 들판에서 선대의 유산인 칼에 근거하여 해미의 행방을 매개로 하여 벤을 상실하는 과정은 벤과 처음 조우할 때 현대적인 공항 터미널에서 선대의 유산인 트럭에 근거하여 해미를 매개했던 것과 대구 됩니다. 종수가 동시성을 가진 벤의 모호함을 파괴하는 순간 벤은 사정(精)하듯 종수를 끌어안습니다. 그렇게 잉태된 알몸의 종수는 최초의 불길에 대한 기억을 간직한 채 예민할지언정 결코 모호하지는 않은 성숙한 창작자로 거듭납니다. 

     

     

     

     

     

     

    이 수레바퀴의 인상적인 부분은 종수가 해미의 완전한 부재를 확신하고 나서야 자위행위를 멈춘다는 점입니다. 옷을 벗고 하는 섹스와는 달리 성기만 내놓은 채 하는 자위행위만으로는 벤의 상실을 이끌 수 없습니다. 종수는 글을 쓸 때 비로소 벤의 시선과 포르셰를 함께 태워버릴 수 있죠. 종수는 그렇게 알몸으로 돌아갑니다. 해미와 섹스를 할 때와는 달리 이때에는 콘돔조차 없는, 어릴 때 불타는 비닐하우스를 볼 때의 순수한 알몸입니다. 즉 해미의 외면적 불확실성은 벤의 내면적 불확실성으로 변이하고 결국 종수의 손을 통해 칼과 휘발유로 소거합니다. 어릴 때 불길을 보며 환희에 찼던 종수는 이제 아무리 춥고 괴로울지라도 더 이상 그 불빛에 눈길조차 주지 않습니다. 그렇게 물류 운송을 하던 종수는 글을 쓰는 종수로 거듭납니다. 

     

    이들의 필연적으로 연결고리는 마치 창작 주기, 또는 윤회 자체를 은유할 수 있습니다. 창작자의 입장에서 감각을 통해 느끼는 세상이란 마치 끝없이 마주할 안티테제와도 같습니다. 어릴 때 봤던 불붙은 비닐하우스처럼, 남산 타워를 비추던 찰나의 빛 한 조각처럼, 벤과 해미와 함께 있을 때를 비추는 타는 듯한 노을처럼 결국 벤과 포르셰와 종수의 옷가지를 태우는 빛도 언젠가는 사라지고 다시 미지의 세상을 맞이할 것입니다. 우리는 안갯속을 끝없이 더듬거릴 뿐이죠. 언젠가 종수는 또 다른 해미와 벤을 만날 것이고 그렇게 방사하는 에너지가 한 줄기로 모이는 순간 날카로운 체호프의 칼끝은 세상을 찢어발기고 불태울 것입니다. 어쩐지 그리스 신화적 예언처럼 뒷맛이 씁쓸합니다. 

     

     

     

    4. 창작은 세상의 해석이다.

     

    〈버닝〉에서 초점을 맞추는 부분은 모호한 상태의 자의적인 확정을 통한 세상의 해석입니다. 종수의 고향 마을인 파주시 탄현면에서 아버지에 대한 탄원서를 받으러 다닐 때 다문화가정의 며느리는 스스로를 '아무도 없어요'라고 말하고 종수는 이에 수긍합니다. 벤의 친구와 대화를 나눌 때 종수는 등단하지 못한 자신을 작가로서 소개하기 주저하지만 벤은 글을 쓰는 행위에 초점을 맞춰 종수를 작가로 소개합니다. 이러한 해석은 스스로의 상태를 해석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세상의 미스터리를 향해 의미의 확장을 시도합니다. 벤은 이미 요리된 해미의 이야기를 마음껏 씹어먹을 수 있지만 해석의 주체가 되는 종수의 글은 먹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가 종수를 좋아하는 것 아닐까요. 

     

     

     

     

     

     

    이렇듯 〈버닝〉은 미학과 은유를 무기로 창작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접근을 하는 영화입니다. 창작에 대한 확신은 내게 없는 것을 알게 만드는 소크라테스의 문답법을 파괴하며 피어납니다. 마치 없는 것을 잊어버리는 해미의 팬터마임이 그랬던 것처럼요. 한 가지 염두할 것은 의미는 이야기에 선행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좋은 은유는 결국 좋은 이야기를 만들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감독은 예민하게 인지하고 있습니다. 약간 당돌하게 말해서 손목시계와 고양이로 투영되는 해미의 행방에 대한 서스펜스는 결국 관객을 객석에 앉혀놓게 하기 위함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극의 미스터리는 흥미진진합니다. 영화 내에서는 의미심장한 말이 참 많이 나옵니다. 그러나 저는 그것이 함유한 모든 것을 자기 완결적으로 해석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합니다. 기록과 전시라는 행위 자체가 내포하는 의미심장함을 내적인 측면에서 매달린다면 영영 풀 수는 없겠지요. 그렇다면 〈버닝〉은 훌륭한 이야기인 셈입니다.  

     

    이야기의 측면에서 이 영화는 구상을 수단으로 추상을 목표하는 예술입니다. 〈박화영〉에서 여자와 남자가 담배를 태우며 하나의 페트병 재떨이에 침을 나눠 뱉는 장면이 있는데 〈버닝〉에서도 종수와 해미가 담배를 태우며 하나의 종이컵에 침을 뱉는 장면이 나옵니다. 아름다운 장면입니다. 이런 연출 말고도 영화에서 담은 공간 자체가 특히 아름답습니다. 반포와 인천 공항도 아름답지만 영화의 주요 배경이 되는 파주에 대해 생각한다면 박찬옥 감독의 〈파주〉와 김금희 작가의 〈너무 한낮의 연애〉가 떠오릅니다. 언젠가는 파주에 가보고 싶습니다. 

     

     

     

     

     

     

    사랑을 나누고 강의를 수강하고 학생들을 가르치고 창작물을 만들고 감상하면서 얻은 결론은 상대방을 배려하는 것과 상대방을 깔보는 것은 다르다는 점입니다. 누군가에 대한 위로를 전제하는 많은 창작물들이 자신도 모르는 새 위로의 대상을 자신이 계도해야 할 존재로 여기고 있습니다 저는 이를 '교사의 착각'이라고 부르는데 이창동 감독의 영화에서는 ‘교사의 착각'에서 오는 거북함이 없습니다. 역설적이게도 교사로 일해본 감독의 개인사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순수로의 회귀라는 측면에서 어쩌면 감독의 초기 작품들과 닮았습니다. 이렇게 감독은 한 계단을 넘은 듯합니다. 감독의 렌즈를 통해서 저는 근시안적인 공감과 연대의 잿더미를 딛고 일어나는 세상을 봅니다. 일방적인 위로는 쉽고 쌍방적인 타협은 어렵기에 이러한 시도는 더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창작자와 소비자 모두는 최소한의 힘을 길러야겠지요. 

     

     

     

     

     

     

    물론 저 또한 저만의 거울에 비춰 〈버닝〉을 한 창작자의 여정으로 인화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본 〈버닝〉이 과 계급의 충돌로 본 〈버닝〉과 상충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씨네21과 진행한 인터뷰에서 감독은 영화의 결말 부분 해미의 방에서 종수가 글을 쓰는 행위에 대해 '단순히 쓰기를 시작한다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문제는 종수가 소설을 ‘쓴다’가 아니라 종수가 ‘어떤 소설’을 쓰는가다.' 라는 언급을 합니다. 분명 어떤 소설을 쓰냐는 중요한 문제이지만 일단 지금의 저에게는 단지 종수가 어떤 소설이든 쓰는 것만으로 충분한 듯싶습니다. 일단은 포크너의 소설을 읽어봐야겠습니다.

     

     

    20220315

     

     

     

     

     

     

     

     

     

     

    영화에 대한 여러 글을 읽는 도중 저와 유사하게 〈버닝〉을 예술가의 여정으로 해석한 후기가 있어 공유합니다. 참고할 점이 많은 굉장히 좋은 시선이라고 생각합니다. 

     

    익스트림무비 - <버닝> 내맘대로 해석 (스포 유)

     

    extmovie.com

     

     

    제목에 노출된 혐오적인 표현과 글 후반부의 배우와 감독에 대한 시선은 동의하기 어려운 글입니다. 그러나 포크너와 하루키를 기반으로 한 해석과 영화의 메타포에 대한 직관은 훌륭하다고 생각해서 공유합니다. 

     

    버닝 - 한남, 메타포를 태우다

    기이한 영화였다. 이창동의 작품이 늘 그렇듯 시적이고 치밀하지만 이전과는 달리 무의식적인 측면이 유난...

    blog.naver.com

     

     

    〈버닝〉의 의의를 영화 외적으로 확장한 시선이 좋은 글입니다.

     

    '버닝' 껍데기를 태우다 | 에스콰이어 코리아 (Esquire Korea)

    어쩌면 '버닝'은 이창동의 첫 번째 영화일지도 모른다. 잘 알려진 대로 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소설 를 원작으로 한 작품이다. 는 ‘헛간을 태운다’는 모호한 말을 하는 ‘그’와 그 말을 듣

    www.esquirekore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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