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1 영화 연말 결산(1), 홍콩 영화의 발견_무간도, 첨밀밀, 아비정전, 화양연화공간/영화 2022. 1. 1. 02:42
2021년은 제 개인적인 창작에 있어 방향을 잡아가는 해였습니다. 몇 가지 분야에서 몇 번의 실패를 겪었지만 그 실패에서 발전의 가능성을 찾을 수 있기에 의미가 있는 도전이었지 않나 싶습니다. 그 가능성의 탐색에는 반쯤은 의무적으로 영화를 감상해온 습관이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표현 방식에 있어서의 방법론적인 고민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충분한 고민을 하고 여러 기법을 연구하는 것에도 분명 영화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올 한 해 제가 감상한 영화 몇 가지를 골라 분류한 후 간단하게 돌아볼까 합니다.
1. 홍콩 영화의 발견
저는 홍콩 영화 세대가 아닙니다. 어렸을 때 갔던 수련회에서 “소림 축구”나 “쿵푸 허슬”을 틀어주기는 했으나 그때의 저는 영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몇몇 장면에 대한 단편적인 기억을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다 올해 초에 일산에 있는 친구네 집에 모여 밤새 술을 마시면서 추억의 “쿵푸 허슬”과 한국 영화 “신세계”를 틀어놓게 되었습니다.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느라 철 지난 주성치식 코미디 “쿵푸 허슬"이나 케이블 채널에서 여러 번 스쳐 지나간 "신세계”에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는 않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그 기억이 저를 문득 "무간도"로 이끄는데 은근한 영향을 끼치지 않았나 싶습니다.
낯선 문화권의 영화인 데다 거의 20년 전 영화라서 이질감이 심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그것은 괜한 걱정이었습니다. “무간도”는 “신세계"에 큰 영향을 끼친 홍콩 영화입니다. 흥미로운 이야기 전개를 가진 누아르 영화 “무간도”에서는 명배우 양조위와 유덕화의 매력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제는 구식이 된 장치들, 예를 들어 영화의 감정이 격할 때 울리는 구슬픈 노래와 남용되는 슬로 모션마저 시대의 향수라는 포장지를 두르고 즐길 수 있었습니다.
“무간도"를 감상한 이후로 얼마 후 우연히 “첨밀밀”을 감상하게 되었습니다. “첨밀밀”은 저에게는 영화적으로서는 특별할 것 없는 그저 그런 로맨스 작품이었습니다. 하지만 “첨밀밀”의 배경이 되는 홍콩의 이민자들에 대한 이야기는 큰 매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첨밀밀”에서 다루는 홍콩 이민자들의 서사가 가지는 매력 못지않게 배우 장만옥이 가지는 매력 또한 대단했습니다. 이런 이유 덕분에 홍콩 영화에 대한 호기심이 깊어졌고 이후로도 몇 가지 영화를 더 찾아봤습니다. 그러다 어느 블로그에서 홍콩 영화는 왕가위 감독을 빼고서는 이야기하기 힘들다는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왕가위 감독의 영화를 찾던 중 첫 번째로 선택 영화가 “아비정전”입니다.
극장이 아닌 OTT 서비스를 이용해 집에서 영화를 감상할 때 정적이고 반복적으로 진행되는 영화 도입부는 큰 걸림돌입니다. "아비정전"의 도입부가 그랬습니다. 그러나 몽환적인 대사로 장식된 은유적이고 반복적인 도입부를 힘들게 넘기니 비로소 “아비정전”이 지닌 매력에 빠질 수 있었습니다. 특히 감각적인 장면들과 아름다운 미장센을 보니 왜 사람들이 왕가위의 영화를 특별하게 기억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쉽게만 삼킬 수 있는 영화는 아니었습니다. 필리핀에 있는 어머니의 집을 나서는 장면은 정말 멋있었지만 이후 갑작스러운 전개를 따라가는데 어려움을 느낀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누군가의 표현처럼 오히려 기존 진행과 대비되는 톤의 마무리가 이 영화에게 명작이라는 이름표를 붙였었는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아비정전”을 보고 나서도 왕가위의 영화를 더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후 지인의 추천으로 “화양연화”를 감상하게 되었습니다.
좋았던 시절은 전부 떠났다는 주제에 크게 매력을 느끼기 때문일까요, 저는 “아비정전”보다 “화양연화"가 더 좋았습니다. 화양연화는 아름다울 뿐 아니라 인물에 대한 몰입감도 뛰어났습니다. 장만옥과 양조위의 합은 말할 것도 없이 훌륭했고 영화의 매우 정교한 미장센은 그런 정교함을 별로 즐기지 않는 저 같은 사람마저 감탄하게 만들었습니다. 영화에서 반복적으로 음악이 나오는 장면은 정말 인상 깊습니다. 그 곡 자체의 분위기 어딘가 고급스러우면서도 처량한 느낌이 들었는데 재미있게도 저는 그 음악을 들으며 홍상수 감독 영화의 몇몇 장면을 떠올렸습니다.
올해 좋은 홍콩 영화 몇 개를 감상한 것은 즐거운 경험이었습니다. 이러한 경험을 할 때마다 경험하지 않았다면 좋은지 모르는 것들이 얼마나 많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더욱 다양한 배경의 영화를 감상함으로써 저의 세계관을 계속해서 넓히고 싶습니다.
'2021 영화 연말 결산(2), 한국 작가주의 영화의 시선에 비친 공간'에서 이어집니다.'공간 > 영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21 영화 연말 결산(3), 미국 영화 샐러드: 모던 클래식_갱스 오브 뉴욕, 데어 윌 비 블러드, 아이리시맨, 조디악 (2) 2022.01.13 2021 영화 연말 결산(2), 한국 작가주의 영화의 시선에 비친 공간_애니멀 타운, 명왕성, 아기와 나, 유혹 (0) 2022.01.01 2021년 영화 감상 목록 (0) 2021.12.31 타인은 지옥이다 후기 (0) 2021.09.28 아이 후기 (0) 2021.05.31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