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수린, 여름의 빌라 후기
8개의 단편 소설을 묶은 단편집입니다. 8개의 작품 중에서 4개의 작품은 외국이 주요한 배경으로 나옵니다. 저는 장기간의 체류는 고사하고 여행 경험조차 거의 없는 사람입니다. 저는 공항 탑승동의 밝고 산뜻한 공기보다는 불타는 막창, 룸 호프 따위가 써진 총천연색 간판이 젖은 아스팔트 위로 반사되는 불빛에 더 많은 영감을 얻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백수린의 작품을 좋아합니다. 좋은 요리 앞에서는 편식이 의미 없는 것처럼요.
본 책에 실린 단편들은 공통적인 서사 구조를 지닙니다. 서술의 주체로 등장하는 인물들은 그 타고난 신중함과 소심함 때문에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경계합니다. 사회의 중간 계층에 자리한 인물은 타인과의 접촉을 통해 자신의 세상을 넓힙니다. 이렇게 시작된 세상의 확장은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영원히 지속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위대한 여정이라도, 아무리 애틋한 사랑이라도 언젠가는 끝이 나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시간이라는 손길은 인물의 확장된 세상을 미모사처럼 오므라들게 만듭니다. 결국 인물의 세상은 타인을 만나기 이전의 상태로 수축하게 됩니다. 그러나 작가의 탐색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인물은 세상이 이전과 같이 수축한 뒤에도 확장된 세상에 대한 감각은 여전히 남아있음을 발견합니다. 저는 그 감각을 상실감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저는 이 상실감이라는 것이 삶의 이유라는 말과 같은 것을 가리킨다고 감히 짐작합니다. 세상이 확장되었다가 다시 수축하는 과정은 마치 풍선을 불었다가 놓칠 때나 눈을 감고 팔다리를 휘저어 평형을 할 때처럼 우리를 어딘가로 움직이게 만들 것입니다. 이렇게 움직이는 인물들은 혁명가는 고사하고 개혁가조차 되지 못할 것이지만 이 사실을 알기에 저는 백수린 소설 속의 인물들에게 에토스적인 신뢰를 보낼 수 있습니다.
[여름의 빌라]에 실린 여덟 편의 단편은 다양한 배경의 다양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결국 작가가 그려내고 싶었던 것은 다시는 돌아갈 수 없기에 아름다운 시간들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어떤 기분으로 어떤 시간을 보냈든 언젠가 음악은 끝이 나고 우리는 다시 어둡고 습한 거리로 나와서 조금 초라한 기분으로 점점이 박힌 가로등 불빛을 따라 집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책을 읽고 나니 이 사실이 유독 시리게 와닿습니다.
최근 한국 문학을 읽는 것에 약간의 피로감을 느낀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한동안은 인물과 사건을 다룬 역사나 철학 쪽의 번역서만 읽었고 문학을 읽을 때에도 번역서를 선택했습니다. 우연의 결과로 오랜만에 고른 한국 문학이 백수린 단편집 [여름의 빌라]라는 사실이 행복합니다. [시간의 궤적], [여름의 빌라], [고요한 사건]은 이미 여러 번 읽었던 작품들이지만 오랜만에 다시 읽으니 더 좋았습니다. [여름의 빌라]에서 찾을 수 있는 예민한 감각은 읽을 때마다 놀랍습니다. [고요한 사건]은 언제 읽어도 아름다운 단편입니다. [아카시아 숲, 첫 입맞춤]은 제가 좋아하는 서술 구조였습니다.
한길문고 (구매)
20210927(~139p)
20210930(~290p)完
'공간 > 독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휴먼카인드 후기 (0) 2021.12.13 디 에센셜: 다자이 오사무 후기 (2) 2021.11.05 그리스인 조르바 후기 (0) 2021.05.07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후기 (0) 2021.04.16 2020년 독서 목록 (0) 2021.01.17 댓글